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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에 꼭 필요했던 군주, 태종 이방원

  • 이정찬
  • 2020-01-23 08: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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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에 꼭 필요했던 군주, 태종 이방원

 

서기후 1402 3 6, 조선시대에 명나라로 파견되어 중국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던 사신하성절사(賀聖節使)의 최유경이 조선에 귀국했습니다. “연병(燕兵)의 기세가 강하여 승기를 타고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는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달단(몽골)의 군대가 이 틈을 이용해 연()과 요() 사이로 침략하여 중국이 어수선합니다.” 최유경은 명나라의 정세를 다급히 보고했습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1398년에 사망하자, 장자 주표의 맏아들 주윤문이 건문제로 즉위했습니다. 2대 황제 건문제는 북방에서 거대 세력을 이루고 있던 연왕(燕王) 주체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연왕 주체는 건문제의 삼촌이었습니다. 주원장의 4째 아들과 주원장의 맏손자가 다투게 된 것입니다. 1399년부터 본격화된 내전은 처음에는 건문제가 우위였으나, 1402년 연왕 주체가 수도 남경을 기습 공격해 함락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1402 7 17, 연왕 주체는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했습니다.

 

최유경의 귀국 보고는 연왕 주체가 남경을 함락하기 수개월 전의 일입니다. 당시 조선의 경우 태종 이방원이 3대 국왕으로 즉위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방원은 1398 8월의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 1월의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1400 11월에 2대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적 상황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 15, 태조 7 9 5일 정축 3번째기사정종실록 3, 정종 2 1 28일 갑오 3번째기사정종실록 6, 정종 2 11 11일 신미 1번째기사 참조)

 

1402 3월부터 요동(遼東)의 난리를 피해 도망오는 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남녀 90명이 의주(義州)로 도망해 왔고, 또 백성 150호가 이성(泥城)에 도착했습니다. 3 26일에는 만산군(漫散軍) 2000여 명이 강계(江界)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의 만산군은 명나라 요동에 군정(軍丁)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군역과 요역을 피해 달아난 고려인을 의미합니다. 명나라 건국 초기 요동은 한인(漢人) 70%, 고려인과 여진인이 30%를 차지했습니다. 요동 25() 2()의 호구수는 27만여 호였고, 군대수는 12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동의 정세 변동에 따라 이주민이 급증하자, 내서사인(內書舍人) 이지직과 좌정언(左正言) 전가식이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도망한 자를 부르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임은 ‘춘추(春秋)’에서 격외로 취급받는 것이옵니다. 오늘날 요동(遼東), 심양(瀋陽)의 백성들이 기근을 핑계로 망명하여 붙습니다만, 이들은 비록 본조(本朝)의 백성이라 하더라도 전에 이미 우리를 배반하였고, 오늘은 또 저들을 배반하니 반복하여 믿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제 대국(大國)을 신하로서 섬기옵는데, 다시 배반자를 받아들인다면 사대(事大)의 의리에 어긋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도망하여 와서 붙는 자는 바로 붙잡아 되돌려 보내게 하고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3 29, 요동의 군사 5000여 명이 만산군을 추격하여 이성(泥城)에 이르렀습니다. 요동 총병관(總兵官)은 조선으로 달아난 만산군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거부했습니다. 만산군으로서 조선에 온 자는 없으며,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인근 산골짜기가 깊어서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 알게 된다면 잡아 돌려보내겠다고 답변했습니다. 만산군의 송환이 양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을 살펴보고 태종은 만산군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4 5, 의주(義州) 천호(千戶) 함영언이 입궐했습니다. 함영언은 요동의 정세를 직접 보고 듣고 돌아온 자였고, 그를 통해 동녕위(東寧衛) 천호(千戶)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 3000여 호를 거느리고 배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지휘(指揮)와 요() 천호(千戶) 등이 1500명을 거느리고 임팔라실리를 추격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길거리에 효수되었습니다. 또 임팔라실리는 추격해온 심양위(瀋陽衛), 개원위(開原衛) 군사의 반수를 죽인 후 포주강(鋪州江, 파저강)을 건너 강계(江界)에 근접해왔습니다. 임팔라실리는 “조선에 귀속하고자 하는데 만약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고 말을 전했습니다.

 

함영언은 압록강 이북에 임팔라실리가 죽인 군사들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활, , 갑옷, 투구 등 버려진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고, 함영언은 만여 명은 되는 것 같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에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태종 2 4월조에는 임팔라실리가 3000여 호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고, 5월조에는 18600호를 거느렸다고 되어 있지만 함여언의 답변과 함께 당시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들은 3000여 호로서 총 18600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4 16, 태종은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만산군의 처분에 대해 의논케 했습니다. 태종은 이들을 강변에 그대로 두고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입국시켜 각처에 분산시킬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경우 식량이 떨어지면 난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고, 군사를 모아 방어케 하면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놓칠 것을 염려했습니다. 강변에 그대로 두고 지켜보자는 사람이 스물세 명, 강을 건너도록 해서 각처에 분산시키자는 사람이 열두 명이었습니다. 태종은 신중한 자세로 만산군의 처분에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륜(河崙)은 “지금 허용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굶주림에 다달아 반드시 해를 끼칠 것입니다. 비록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무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태종은 통사(通事) 최운에게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네가 정료위(定遼衛)로 가게 되면 다만 ‘만산군이 포주(鋪州) 등지에 와서 주둔하고 있는데 그들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알지 못하겠다’하고, 요동 사람이 만약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치려고 하면 너는 ‘포주 등지는 산수(山水)가 깊고 험하여 대군(大軍)이 갈 수 없다’고 하라.” 혼란이 없도록 하려는 계략과 단호한 결단이었습니다.

 

5 4, 임팔라실리의 무리는 갑옷, 투구, , 화살, , , 깃발, 나발, 징 등을 바쳤습니다. 조선은 임팔라실리 등 지휘부 10여 명을 평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예빈시윤(禮賓寺尹) 최관은 이들에게 음식을 먹이며 긴장을 풀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음식을 먹고 공손히 감사의 절을 할 때 전격적으로 결박하여 가두어 버렸습니다. 5 8, 태종은 임팔라실리의 송환 문제를 삼부(三府)에 명하여 논의케 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5 13, 조선은 임팔라실리를 평양에서 한양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 무렵 명나라 좌군(左軍) 도독부(都督府)로부터 만산군을 돌려보내달라는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5월말 먼저 만산군 869명을 풍해도(황해도 일대)에 분산 배치하고 식량을 지급했습니다. 이어 9 17, 태종은 다시 임팔라실리의 무리를 여러 도()에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전라도에 1585, 경상도에 1297, 충청도에 854명 등 총 4224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태종이 만산군에 대한 명나라의 송환 요구를 묵살하고 이들을 입국시켜 각 도에 분산 배치한 것은 명나라와의 대결도 각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9 11일에 태종은 우정승 이무에게 축성 작업에 대해 물었고 “이성(泥城)과 강계(江界)는 이미 끝났고, 의주(義州)는 돌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이성, 강계, 의주는 당시 모두 북방 국경일대의 조선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2월말, 태종은 돌연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12 23, 형조(刑曹) 전서(典書) 진의귀로 하여금 임팔라실리를 압송하여 요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1 21일에는 각 도에 지인(知印)을 나누어 보내 만산군을 추쇄하도록 독촉했습니다. 결국 1403 1 27, 만산군 총 3649명을 요동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앞서 각 도에 분산 배치한 만산군이 4000여 명이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을 추쇄하여 송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동의 난리를 피해 조선으로 넘어와 정착했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종이 갑자기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원래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대명 강경파였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제거하고 정국을 장악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받지 못했던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건문제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원칙대로 본다면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친 것은 반역입니다. 하지만 태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즉위했던 것처럼, 연왕 주체가 조카를 내전으로 몰아낸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건문제와 연왕 주체의 내전이 지속될 때에는 만산군을 받아들여 국경 일대의 위험을 제거했습니다. 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임팔라실리를 비롯한 지휘부 10여 명을 미리 포박해 두었습니다. 1402 7, 명나라 연왕 주체가 건문제를 몰아내자 사태를 주시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적극적인 정보 활동을 통해 명나라 내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자 곧바로 하등극사(賀登極使)를 파견했습니다. 영락제 즉위후 요동이 안정되자 다시 임팔라실리를 비롯한 만산군을 대대적으로 송환해 명나라와의 후환을 없애버렸습니다. 위급할 때마다 냉정함을 유지한 태종의 성격이 읽혀지는 조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요동의 정세 변동에 기민하게 대처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사의(趙思義)의 난을 진압하여 반대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모여 조선에서 태종이 없었다면 조선도 세종도 없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조선은 태종의 밑거름 위에 세종의 태평성대가 꽃피었습니다세종은 유언까지 할 정도로 아버지 태종을 기리며 곁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묻혔던 왕릉에서 물이 나와 결국 풍수사(風水師)에 의해 흉혈로 밝혀졌습니다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沈氏)가 합장된 능역으로 조선 조정에서 1469(예종 1), 명당보국(明堂保局)의 수배령을 내려 지금의 헌릉(태종,원경왕후)이 있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內谷洞)에서 경기도 여주(驪州)로 명당 혈처를 찾아서 천장(遷葬)하였습니다. 조선왕릉 중에 최초로 한개의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로 단일 왕조로써 지속된 사례도 드물거니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습니다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에 이릅니다. 특히 이 가운데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 6 27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지구촌 어느 곳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1418(세종 1) 11 24일 첫눈이 내렸습니다. 상왕 태종은 환관 최유에게 눈을 상자에 조금 퍼담으라고 합니다. "이걸 노상왕께 갖다 드리고 보신음식이라고 말씀을 하게." 노상왕은 형 정종이었습니다. 정종은 상자를 들고오는 환관을 보자, 이미 장난치러 오는 줄 알아챘습니다. "저놈 잡아라"라고 최유를 가리키자, 이 환관은 상자를 던져놓고 잽싸게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걸 보고 정종은 껄껄 웃었습니다. 장난스런 태종과 그런 장난을 웃어 넘기는 정종을 그려보면서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첫눈 만우절'이 있었음을 뜻밖에 알게 됩니다이렇게 만우절은 현재와 날짜는 다르지만 조선시대 왕들도 즐기곤 했다고 전합니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만우절은 이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악의 없는 장난으로 지인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밌는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던 것입니다이같은 내용이 '세종실록'에 비록 '왕자의 난'으로 군주가 되었지만 사실은 고려 말기인 1382(우왕 8) 과거에 문과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됐을만큼 문인기질로 조사의 반란 때는 선봉에 서기도 했던 호방한 성격의 52 태종 이방원과 62세 정종 이방과(李芳果)의 형제간에 장난끼 어린 만우절 모습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좀더 만우절의 유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 서양에서는 새해를 1 1일이 아닌 3 25일에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3 25일이 되면 축제를 열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습니다그런데 1564년에 프랑스 왕 샤를 9세가 새해를 3 25일에서 4 1일로 바꿔 버렸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오래 전부터 해 오던대로 3 25일에 설을 쇠었습니다. 대신 4 1일에는 설을 쇠는 흉내를 냈습니다. 장난스럽게 새해 잔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4 1일에 만우절 풍습이 생긴 것이고 서양에서는 만우절 날 속아 넘어간 사람을 '4월 바보'라고 하여, 만우절을 '4월 바보들의 날'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이것이 선교사들에 의해 요즘의 모습으로 조선말기 무렵에 전해졌습니다현재 대한민국에는 만우절이 있지만 북한에는 지금까지 만우절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궁중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증명하듯 지금의 만우절과 비슷한 날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첫눈 내리는 날입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만큼은 궁궐 사람들이 임금님에게 가벼운 거짓말을 해도 용서가 되었다고 합니다우리 조상들은 첫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첫눈 내리는 날에는 가벼운 거짓말을 해도 눈감아 준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려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생몰연대가 1563(명종 18) 1633(인조 11) 학자이자 서예가였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인조(仁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당대의 석학으로 태종우(太宗雨)라는 시조를 남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은택 흐르니

아아 선왕을 잊을 수 없도다

해마다 이날에는 비가 내리니

방울마다 성왕의 은덕이고말고

누렇게 시든 잎들 씻어 주고

말라 죽는 혼을 소생케 하네

새벽에 나가 들판을 바라보니

온 세상에 기쁜 기운 가득하구나

 

沒世猶流澤 (몰세유유택)

於戲不可諼 (오희불가훤)

年年是日雨 (연년시일우)

點點聖王恩 (점점성왕은)

淨洗芸黃色 (정세운황색)

昭蘇暍死魂 (소소갈사혼)

星言觀四野( 성언관사야)

喜氣滿乾坤 (희기만건곤)

 

1422(세종 4) 초여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가뭄에 국왕은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렸는데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세종에게 양위하고 병석에 누워 있던 태종(太宗, 1367 ~ 1422년 재위 1400년 ∼1418)은 이를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가 상제(上帝)께 고하여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고까지 하였는데 5 10일 결국 승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경기 일원에 큰비가 내려 그해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백성을 걱정하던 태종의 정성이 하늘을 정말로 감동시켜서였을까요? 이후로 매년 5 10일이 되면 으레 비가 내렸고 백성들은 이 비에 '태종우(太宗雨)'라는 이름을 붙여 태종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려 말에 이방원(李芳遠)이 지은 시조로 알려진 하여가(何如歌)는 정황상 반대당이었던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지어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고려개혁을 꿈꾸면서 신진사대부 결성에 이성계를 이용했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걸림돌이 되자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사건을 기회로 삼아 고려 왕조를 옹호했던 김진양(金震陽), 서견(徐甄) 등과 함께 탄핵정국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낙마하여 위중하자 당시 왕에게 직간이 가능했던 간관(諫官) 직책의 김진양이 정몽주의 지시를 받고 이성계의 일파인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윤소종(尹紹宗), 조박(趙璞), 남은(南誾) 등을 탄핵하여 살해한 뒤 이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뜻은 이루지 못했습니다하여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우리도 이같이 얼거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한역되어 전합니다.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에 대하여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응수하였습니다. 이 두 작품은 「하여가」가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우회적 기교로 여유롭고 느긋함에 비하여 「단심가」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 이방원은 얽힘의 논리로 화해와 조화를 희구하고 있는데, 정몽주는 죽음의 논리로 의지와 단절을 노래하고 있어, 당시 두 사람이 처한 입장이 다르듯 곧 지략적인 정치가와 비타협적인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사계절(four seasons , 四季節)이라 하여 흔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야기합니다. 사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공전에 따른 결과이며, 중위도지방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기에 중위도지방의 경우 봄은 3~5, 여름은 6~8, 가을은 9~11, 겨울은 12~2월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그러나 근대 이전 서양에서는 무한히 되풀이 되는 가변적이며 불안정하고 혼돈스러운 현실과는 다른 질서의 세계, 천상적이며 영원한 초월적 세계를 즐겨 상정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주변 세계의 변화가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변화에는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중심에 있습니다. 흥망성쇠는 사람의 운수와 나라의 운명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돌고 돌아 늘 변한다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뜻으로 사물이나 형세는 고정불변인 것이 아니라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마련이라는 뜻도 있고,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지나친 고집이나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은 이같은 맥락에서 생장성쇠(生長盛衰) 사계절과 같은 흥망성쇠가 어쩔 수 없이 적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 아래의 내용은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어 잠시 이곳에 옮겨봅니다. 하지만 생각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평가도 있을 것이기에 그저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중용(中庸) 31장에는 이같은 구절이 나온다.

  “오직 천하 제일의 빼어난 임금만이 능히 귀눈 밝고 사람에 밝아 사리에도 밝은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족히 ‘제대로 된 다스림’이 있게 된다.
 
  ,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있어야만 빼어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 지()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으로 예(), 즉 사리(事理)에 밝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리에 밝다’는 것은 풀면 일이 되어가는 이치에 밝다는 것이다. 즉 일을 (할 줄) 아는 사람(知事者)이다. 리더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지인(知人) 못지않게 지사(知事)에도 능해야 한다.
  

 진정한 인제를 알아본 지인(知人)의 리더쉽 


 
태종 이방원은 피를 나눈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기에 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돌아보는 인물이었다. 지혜나 학식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경륜은 아직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이 부족한 부분을 대체하기 위해서 당시 최고의 논객이자 거의 스무 살이나 연상이던 하륜을 참모로 활용했다. 하륜은 태종의 오른팔로, 경제와 정치적 모사에 능했던 최고의 참모였다.

 

 태종은 어린시절 자신의 결혼식에서 하륜과 잠시 스치며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인상을 기억해뒀다. 당시 하륜은 신돈의 측근을 비판했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여말권세가이자 장군이던 최영의 정책을 비판해 밀려나기도 했다.

 

 태종은 그를 기억해뒀다가 자신의 참모로 활용해 가장 어려웠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줬다. 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의견을 실천적으로 주도해가는 건 군주의 몫이다. 태종은 그런 면에서 열린 마음과 눈을 갖고 있었던 리더였다.

 

 위화도 회군 당시에 보여준 지사(知事) 리더쉽
  
 《태조실록》에는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을 당시 개경과 인근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 가족들의 다급한 상황이 실려 있다.
  
  애초에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경기도)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비(康妃)는 포천의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는데, 전하(殿下, 태종 이방원)가 전리정랑(典理正郞, 이조정랑)이 되어 서울(당시는 개경)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사제(私第, 현재의 사저) 들어가지 않고서 곧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니 일을 주간하는 노복(奴僕)들은 이미 다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전하가 왕후(王后)와 강비(康妃)를 모시고 동북면(함경도)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가지고 봉양했다.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무안군(撫安君, 이방번), 소도군(昭悼君, 이방석)이 모두 나이가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서 길가의 민가(民家)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밤을 이용하여 몰래 가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다. (강원도)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壯丁) 100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待備)하면서 말했다.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담대함이 느껴지는 예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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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동안을 머물다가 일이 안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의 처자(
妻子)를 가두고자 했으나 조금 후에 일이 급박하여 과연 시행하지 못했다.
  
 
이방원의 말은 적중했다. 만약에 최영이 회군 소식을 보고받고 즉각 한씨와 강씨 등을 붙잡아 인질로 삼았다면 이성계의 회군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반면 그에 앞서 즉각 친어머니와 계모 및 가족을 이끌고 피신시킨 이방원의 이 행동은 일을 아는 자(지사,
知事)만이 취할 수 있는 조치다. 그 이방원은 최영을 일에 밝지 못한 사람(불요사지인, 不曉事之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이방원의 나이 불과 22세 때였다.

 

 후세를 준비한 미래형 리더


 조선의 태종 이방원(재위 1400 ~ 1418)은 태조 이성계의 5남이다. 서열로 봐서도 그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선의 3대 왕이 돼서 실질적인 이씨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고, 태조 이성계가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던 고려의 잔재와 갖가지 폐해들을 말끔히 털어낸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였다.

 

 두 차례에 걸친 골육상쟁을 넘어 피값으로 이룩한 건국 초기의 개혁은 바로 다음 대의 세종에게 이어져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강국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됐다. 태종 이방원이 5백 년 계속되는 왕조와 보위를 이어갈 다음 왕을 위해 보여준 과감성과 도전정신, 어려움을 극복해간 투철한 의지는 오늘날 눈앞의 이익만 쫓아 우왕좌왕하는 아둔한 인생들에게 살아있는 교훈을 던져준다.

 

 문무를 겸비한 준비된 리더쉽


 흔히 태종 이방원 하면 수하를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때려죽인, 칼이나 휘둘러대는 무식한 무인 출신의 왕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아버지 이성계도 무장 출신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갖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입견이다.

 

 이성계는 정말 무장출신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도전 같은 책사를 수하에 둘 수밖에 없었다. 머리는 정도전에게 빌리고 힘은 이성계 자신이 써야 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그렇지 않았다그는 지혜나 학식이 오히려 앞섰으면 앞섰지 결코 다른 신하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우왕 8년이던 1382년 고려 왕조가 실시하던 문과시험에 급제한 문사였다. 그는 태조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고 문무를 겸비해 일찍이 왕이 될 재목이라고 주위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는 문사로서나 외교관으로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조선이 개국했을 때 일시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불편해진 적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조의 왕대별 해제편에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개국 당시에 크게 활약 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국교단절을 선언했을 때, 직접 명나라 서울 금릉(金陵남경, 南京)에 가서 명 태조와 회담해서 국교를 회복하기도했다.” 남다른 외교 수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익힌 외교적 감각과 수완은 훗날 태종의 외교적 업적으로 나타나 밖으로 명() 여진(女眞),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조선의 기초를 확립했고, 이러한 방침이 큰 변화없이 5백년을 이어갔다.

 

 얼음장처럼 냉정한 결단의 리더쉽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낳은 여덟 아들 가운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륜이라고는 없는 막내 이복동생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컸던 이방원은 분연히 일어나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자신의 형인 정종을 왕위로 밀어올렸다.

 

 이때 이복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골육상쟁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정도전 등이 주창한 왕권 약화신권 강화 정책을 더 이상 뒀다가는 애써 이룩한 이씨 왕조의 미래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 1차 왕자의 난 때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으로 난을 일으킨 방간 왕자와의 싸움에서도 이겨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자가 됐다. 그는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으로 등극했다. 1400 11 11일이었다.

 

 태종은 1405년 반대하는 일부 신하들의 견제를 무릅쓰고 수도를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고려의 귀족과 왕족들의 견제와 정치적 잔재를 없애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왕으로 올라서자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들을 대부분 제거했다.

 

 심지어 1407년에는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사사하는 초강수를 뒀다. 1415년에는 다시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고, 이듬해 사사했다. 태종은 또한 같은 해 왕자의 난 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이숙번을 축출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켰다.

 

 이로써 그의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강력한 세력은 없었다. 이는 모두 다음 대를 이을 왕권을 지키고 혹시 있을지 모를 쿠데타 세력을 사전에 발본색원하려는 냉혹한 결단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정비한 후 1418년에 방탕한 생활을 이유로 반항심이 강했던 장자인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민심을 살핀 위민(爲民)의 리더쉽


 태종은 재위동안 숱한 업적을 남겼다. 큰 비만 오면 종묘까지 잠기는 서울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하천을 정비하고 돌다리(광평교)를 세워 통행을 편하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청계천이다.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을 세웠고, 백관의 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했으며, 호패법을 실시해 호구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호적을 만들고 경제제도를 개편해 백성들이 보다 편하게 살 길을 찾는 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한 것은 태종이었다. 신문고는 조선 태종 1(1401)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해주기 위해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이다.

 

 먼저 거주지 관청에 가서 자신의 딱한 사연을 고하고 관청에서 해결이 안 되면 신문고를 두드려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제도로, 상소·고발 제도가 법제화되어 있음에도 문제 해결을 보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최후의 직접 고발시스템인 셈이다.


 그러나 신문고는 아무나 함부로 두드릴 수 없었다. 개인사에 가까운 하급관리가 상관을, 노비가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고, 오직 국가의 일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정,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와 누명, 자신과 관계된 억울함만 고발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다로운 제한조건이 있음에도 신문고는 쉴 새 없이 울렸다.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고자 사소한 사건에도 신문고를 찾다보니 최후의 수단이 아닌 민원 급행처리 창구처럼 변질되어 갔다.


 결국 신문고 사용이 더욱 엄격해지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이 되어서, 북을 치기 전에 사헌부를 거쳐야 하고, 허위로 남을 무고하면 엄벌을 내리도록 바뀌었다. 호소할 수 있는 케이스도 역모 고발일 때나 즉시 칠 수 있고, 자기 자신에게 관한 일, 부자지간, 아내에 관한 일,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등으로 제한했다

 
 이쯤 되자 신문고 제도의 본래 취지와 달리 평민이나 천민, 지방에 사는 관리는 거의 쓰지를 못하였고, 주로 서울의 관리, 양반들만 사용하는, 이를테면 수도권 공무원용 제도로 쪼그라들었다. 1401년에 시작된 신문고는 도입된 지 50년 정도는 상당히 활발하게 운영됐으나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폐지와 부활, 개정다시 폐지의 과정을 밟으며 사라져 갔다.

 

 태종은 18년간 왕위에 있다가 세종에게 양위하고 이후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 4(1422) 5월에 56세로 승하했다. 태종이 남긴 업적은 조선 개국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고 경제를 살리면서 민심을 얻어내 태종이 죽자 당시의 모든 백성이 슬퍼했다. 테종은 자신으로 인하여 발생한 불미한 일에 심한 가책을 느꼈는지 끝내 살아 생전, 영정조차 남기지 않았다이로써 조선은 진정한 창업기를 거쳐 정착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초발심  이정찬(李廷瓚)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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